신현송 한은 총재, 정부 재정·물가 정책에 쓴소리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정부의 확장재정과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향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의 재정 확대가 단기적으로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일 수 있고, 석유 최고가격제 역시 장기화하면 시장 가격 체계를 왜곡하고 소비 절약을 유도하는 효과가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취임 초기 정부 정책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온 신 총재가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인위적인 물가 억제 정책의 부작용을 직접 거론하면서 통화당국의 독립적인 목소리가 한층 뚜렷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 총재는 22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위원 7명의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회의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한국은행의 분석 자료를 토대로 정부의 재정 운용과 물가 안정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통화정책은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반면 정부가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릴 경우 정책 효과가 서로 상쇄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 총재는 정부의 확장재정이 단기적으로 총수요를 자극해 물가 상승 압력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반도체 경기 호조에 따른 초과세수 등을 바탕으로 내년도 총지출 예산안을 821조원 규모로 편성했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다.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용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대규모 재정 지출에 나서면 정책 방향이 엇갈리고, 그 결과 경기와 물가에 미치는 효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신 총재는 한국은행의 분석을 근거로 내년 정부 예산안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0.5%포인트 높이고 물가상승률은 0.06%포인트 끌어올릴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 지출이 모두 같은 수준의 경제적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각종 보조금 등 이전지출 항목의 재정승수가 약 0.2 수준으로 낮다는 설명이다. 재정승수는 정부가 지출을 늘렸을 때 경제 전체의 생산이나 소득이 얼마나 증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 같은 발언은 정부의 재정 확대 자체보다 지출의 구성과 사용처가 중요하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현금성 지원이나 보조금처럼 이전지출 성격이 강한 사업은 재정 투입 규모에 비해 실제 투자와 소비를 늘리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호황으로 확보한 재원을 단기적인 지원 사업에 집중하기보다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미래 투자에 활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신 총재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정부의 예산이 지속적인 재정지출 사업으로 이어질 경우 이후 지출을 줄이거나 중단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시적으로 확보한 재원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지출 항목을 만들면 재정 부담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승수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할 것이 아니라, 한 번 도입한 지출이 장기간 유지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들어온 재원을 활용해 지속적인 지출 구조를 만드는 상황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재정 수입이 늘어나는 시기에 지출을 확대하더라도 경기 여건이나 세수가 달라졌을 때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의 재정 운용이 단기적인 경기 부양을 넘어 중장기적인 재정 건전성과 성장 기반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 총재의 비판은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에도 이어졌다. 그는 해당 정책이 비용 상승의 소비자 전가를 막고 물가를 억제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장기간 시행할 경우 시장 가격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에너지 가격이 소비자에게 충분히 반영되지 않으면 가격 상승에 대응해 소비를 줄이려는 유인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신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도 에너지 가격 보조가 장기간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권고를 여러 차례 내놓았다고 언급했다. 에너지 가격을 재정으로 억누르는 정책이 오래 이어지면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을 낮추는 단기적인 효과와 별개로, 시장의 수요 조절 기능과 정부 재정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는 올해 3월 중동전쟁의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정부가 약 30년 만에 도입한 강도 높은 물가 안정 대책이다. 시행 초기에는 소비자물가를 최대 0.6%포인트 낮추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제시되며 정책 성과가 강조됐다. 그러나 제도가 수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석유 소비를 줄이려는 유인이 약해지고, 가격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조정되는 시장 기능이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정부는 최고가격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정유사의 손실을 재정으로 보전하고 있다. 휘발유와 경유 가격을 리터당 1770원대 수준에서 여러 차례 동결하면서 정부가 부담해야 할 보전액은 현재 7조~8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제유가가 일시적으로 진정됐던 미·이란 간 휴전 시기에 정부가 제도 종료를 검토했지만,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국제유가와 국내 물가 상황이 달라지는 가운데 정책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셈이다.
이번 발언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한국은행의 역할론과도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국정감사에서는 독립적인 통화정책 당국인 한국은행이 정부의 확장재정이 물가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고, 필요할 경우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야당의 지적이 나왔다. 신 총재가 정부의 재정정책과 가격 통제 정책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만큼,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과 재정 운용의 균형을 둘러싼 논의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지 관심이 쏠린다.
앞서 신 총재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도입과 관련해서도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국정감사에서는 해당 상품이 증시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한국은행이 위험성을 충분히 경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올해 5월 레버리지 ETF가 도입될 무렵, 관련 상품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국내 투자자금의 해외 유출을 줄이고 해외 자금 유입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평가를 담은 금융안정보고서를 6월에 발표했다. 신 총재는 이 과정에서 판단이 잘못됐거나 실책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취임 6개월을 맞은 신 총재가 기준금리를 동결하는 한편 정부의 재정 확대와 석유 최고가격제의 부작용을 직접 거론하면서 한국은행의 정책 판단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정부 지출이 성장과 물가에 미치는 영향, 에너지 가격 통제가 소비와 재정에 남기는 부담은 향후 경제정책을 둘러싼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단기적인 물가 안정과 경기 지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시장 기능을 어떻게 함께 고려할지가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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